[스포테이너즈=고초록 기자] 안토니오 이노키와 마사 사이토를 상대하고, 훗날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대표하게 된 무토 게이지와 초노 마사히로, 하시모토 신야와 함께 땀을 흘렸다. 거인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한 링에 오른 기억도 생생하다.
198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던 프로레슬러 ‘거목’ 김수홍은 이제 대한프로레슬링협회 회장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의 또 다른 전성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1일, 창설 60주년을 맞은 대한프로레슬링협회의 김수홍 회장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 위치한 협회 사무실에서 만나 선수 시절과 일본 진출,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인연, 한국 프로레슬링의 과거와 현재를 들어봤다. 대한프로레슬링협회는 1966년 설립된 단체로 올해 창설 60주년을 맞았다. 지난 2월에는 현역 프로레슬러 김남훈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선임했다.
김 회장이 현재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현안 가운데 하나는 프로레슬링의 전통무예육성종목 지정이다.
김 회장은 “옛날과 다르게 프로레슬링이 침체됐다”며 “어떻게 해야 다시 부활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프로레슬링은 오랜 역사와 대중에게 끼친 영향 등이 있다”며 전통무예육성종목 지정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지난 5월 시행된 전부개정 「전통무예진흥법」은 전통무예를 국내에서 자생한 무예뿐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뒤 국내에서 독창적으로 정형화·체계화돼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된 무예까지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행규칙상 육성종목 지정 과정에서는 전승 기록과 한국적 특성이 반영된 기술·수련체계, 문화적·스포츠적 가치 등이 평가된다. 다만 지정 여부와 실제 지원 규모는 별개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 신안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운동에 빠지다
김수홍의 고향은 전남 신안이다. 부모는 농사와 정미소, 염전 등을 운영했고 그는 중학교부터 목포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과 힘이 좋았던 그는 복싱과 유도를 접했고 웨이트트레이닝에도 빠졌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헬스장이 흔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목포에 헬스클럽이 없었다”며 “쇠파이프를 구해서 양쪽에 콘크리트를 동그랗게 만들어 벤치프레스를 했다. 아령도 집에서 만들어 운동했다”고 회상했다.
보디빌딩 대회에도 참가했고 이후 유도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던 중 대학 선배였던 프로레슬러 최규옥의 권유를 받아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다.
“체격 조건이 괜찮으니까 프로레슬링을 해보라고 권했어요. 당시 183㎝에 105㎏ 정도 나갔습니다.”
그가 처음 프로레슬링을 배운 곳은 당시 강남구청 인근에 있던 대한프로레슬링협회 훈련장이었다.
김 회장은 이를 ‘건설회관’으로 기억했지만, 1981년 당시 신문자료에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건설빌딩’으로 나타난다. 협회는 강남구청 옆 건설빌딩 1층에 약 100평 규모의 훈련장을 마련했고, 1981년 2월에는 이곳 ‘프로레슬링 종합체육관’에서 등록선수 약 40명을 대상으로 체급별 랭킹전을 추진했다.
김 회장을 지도한 사람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장영철이었다.
“장영철 사범님께 기본적인 것부터 기술까지 많이 배웠습니다. 아주 고지식하고 정직한 분이었어요.”
김 회장은 자신의 데뷔전을 “1981년 봄, 지금은 고인이 된 박내우 선수와 치렀고 이겼다”고 회고했다.
다만 정확한 데뷔 시점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김 회장은 2009년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데뷔를 1980년 3월 서울이라고 밝힌 바 있어 이번 기억과 약 1년의 차이가 있다. 데뷔 상대인 ‘박내우’ 역시 현재 확인되는 공개 경기자료에서는 아직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 1984년 신일본으로…“한국의 기개를 보여주고 싶었다”
김수홍의 프로레슬링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84년이었다. 앞서 한국에서 열린 한일전 등을 통해 김수홍을 눈여겨본 신일본프로레슬링 측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 회장은 한 시리즈만 소화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이노키 회장님이 여건부 선배를 통해서 계속 남아달라고 하셨어요. 5년이고 10년이고 신일본에서 시합하라고요.”
결국 김수홍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신일본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한국 선수들의 경기력에 대한 일본 측의 좋지 않은 선입견을 의식했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들은 훈련량이 부족하고 약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죽는 힘을 다해서 한국의 기개를 한번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일본 선수들보다 더 남아서 훈련했습니다.”
신일본의 훈련은 강도가 높았다. 김 회장은 힌두 스쿼트를 한 번에 500~1000개씩 하고 푸시업과 목 브리지, 러닝, 기술 스파링 등을 반복했다고 회상했다.
그 시절 함께 훈련장을 누빈 젊은 선수들 가운데는 훗날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대표하게 된 무토 게이지, 초노 마사히로, 하시모토 신야, 야마다 게이이치(쥬신 선더 라이거)가 있었다.
김 회장은 “무토나 초노 모두 착한 선수들이었다”며 “같이 훈련하고 경기하면서 나중에 크게 될 선수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웨이트트레이닝에 익숙했던 자신에게 무토와 초노 등이 운동 방법을 묻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 “무토의 데뷔전 상대가 나였다”…공식 기록은 초노전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흥미로운 기억 하나를 꺼냈다.
“무토 게이지의 공식 데뷔전을 저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공식 기록과 차이가 있다.
무토 게이지의 정식 데뷔전으로 기록된 경기는 1984년 10월 5일 사이타마현 고시가야에서 열린 초노 마사히로전이다. 무토는 이 경기에서 역에비가타메로 승리했다.
다만 김수홍과 무토의 인연 자체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무토의 공식 데뷔 불과 이틀 뒤인 10월 7일, 무토는 김수홍과 싱글매치를 치렀다.
김 회장은 과거 인터뷰에서는 무토가 공식 데뷔에 앞서 자신과 비공식적인 경기를 치렀다는 취지로 설명한 적이 있다. 따라서 정식 데뷔 이전 두 사람이 연습 또는 비공개 성격의 경기를 했을 가능성은 남지만, 공식 데뷔전 상대는 초노 마사히로로 보는 것이 맞다.
▲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바디슬램…“산 위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다”
김 회장의 기억 속에는 세계적인 거인 프로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도 남아 있다.
정규 싱글매치라기보다 여러 선수가 차례로 앙드레를 상대하는 이벤트 형태의 경기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앙드레가 저를 바디슬램으로 던지는데 꼭 산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내려오는 시간이 한참 걸리는 것 같았어요.”
태클로 다리를 잡아 넘어뜨리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리를 잡고 넘기려고 하니까 등을 손으로 때리더라고요. 촙도 맞고 발로도 차이고. 힘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앙드레와 맞섰다는 내용은 김 회장이 과거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경기 형태를 태그매치라고 설명한 적도 있어, 정확한 일시와 경기 형식은 추가 자료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 1989년 88체육관, 마침내 이노키와 같은 링에 서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수홍은 직접 프로레슬링 프로모션 운영에 뛰어들었다.
서울 대치동에 ‘월드프로레슬링’을 만들고 프로레슬링 체육관과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후 태권도와 에어로빅, 웨이트트레이닝 시설까지 함께 운영하며 선수 양성에 나섰다.
김 회장은 이미 2006년 인터뷰에서도 “1988년쯤 월드프로레슬링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전용체육관과 사무실을 만들어 시합을 계속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989년 5월 6일, 서울 88체육관에서 자신의 선수 인생을 대표하는 경기 가운데 하나가 열렸다.
김수홍·역발산 vs 안토니오 이노키·마사 사이토.
김 회장은 당초 이노키와 싱글매치가 예정돼 있었지만 협회 측 의견으로 태그매치로 변경됐다고 회고했다.
“KBS 생중계를 하게 되면서 그 시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알게 된 스폰서들도 일본 선수들의 개런티에 도움을 줬고요.”
KBS 생중계와 88체육관 경기 자체는 김 회장이 2006년 인터뷰에서도 1989년 5월 6일이라고 정확히 언급한 내용이다.
다만 중계 성사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한 장재근을 당시 ‘한국일보 회장’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직함상 정확하지 않다. 장재근은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 일가의 경영인이었지만 당시 한국일보 회장은 아니었다. 김 회장과 장재근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이나 중계 주선 과정은 김 회장의 증언으로 남는다.
이날 이노키의 파트너였던 마사 사이토에 대한 김 회장의 기억은 정확하다.
“일본 아마추어 레슬링 국가대표로 올림픽에도 출전했던 분입니다.”
마사 사이토는 실제 1964 도쿄올림픽 자유형 헤비급 일본 대표 출신이었다.
김 회장은 경기 막판 이노키의 엔즈이기리를 맞고 패했던 순간도 기억했다.
“뒤통수를 발로 맞았는데 타격이 컸죠.”
▲ “‘프로레슬링은 쇼다’…장영철 사범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한국 프로레슬링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1965년 ‘프로레슬링은 쇼다’ 파동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 장영철에게 직접 당시 상황을 들었다고 했다.
“장영철 사범님이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겁니다.”
1965년 11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장영철은 일본의 오쿠마 모토시(大熊元司)와 맞붙었다. 경기 도중 충돌이 벌어졌고 한국 선수들이 링으로 뛰어들면서 난투극으로 번졌다. 경찰이 출동해 관련 선수들을 조사했다.
김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장영철은 경찰에서 선수들을 풀어주기 위해 프로레슬링 경기의 규칙과 운영방식을 설명했고, 이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식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장 사범님은 평생 자신이 하지 않은 말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문제를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후대에 남은 천규덕 등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서도 장영철이 링 위에서 정확히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부정되고 있다.
▲ 마에다 아키라와 여건부의 ‘진짜 싸움’…“대기실까지 쫓아갔다”
1986년 신일본에서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김수홍이 직접 목격한 프로레슬링계의 유명한 실전 충돌이다.
1986년 1월 14일 김수홍은 여건부와 팀을 이뤄 마에다 아키라·야마자키 가즈오와 태그매치를 치렀다.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여건부와 마에다 사이의 감정이 링 위에서 폭발했다.
“그날 완전히 실전으로 나가더라고요. 여건부 형하고 마에다가 진짜로 많이 치고받았습니다.”
경기는 마에다가 김수홍에게 암바를 걸어 승리하면서 끝났지만 소동은 링 밖에서도 이어졌다고 한다.
“대기실에서도 소동이 났어요. 쫓아가고, 저도 같이 말리고 난리가 났죠.”
40년이 지난 지금도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한국 프로레슬링의 다음 전성기, 다시 올 수 있다”
김수홍은 이제 선수 대신 대한프로레슬링협회의 수장으로 링을 바라보고 있다.
올해 협회는 현역 선수 김남훈을 사무총장으로 발탁했다. 1966년 협회 설립 이후 현역 프로레슬러가 실무 책임자인 사무총장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김 회장은 직접 김남훈에게 사무총장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선수도 하고, 격투기도 하고, 해설과 방송, 강연도 하고 책도 썼잖아요. 영어와 일본어도 하고요. 김남훈 총장이 들어오면 협회가 한층 젊어지고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회장에게 다시 태어나도 프로레슬러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웃은 그는 뜻밖에 신중한 답을 내놨다.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프로레슬링의 미래를 묻자 답은 달랐다.
“지금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고, 경기도 옛날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합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옛날 못지않게 다시 부활해서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일과 장영철의 시대를 바라보며 프로레슬링을 꿈꿨던 청년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노키와 한솥밥을 먹었고, 무토와 초노 등 훗날의 스타들과 훈련장을 누볐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체육관을 만들고 흥행을 준비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김수홍에게 프로레슬링은 지나간 추억만은 아니었다.
그가 여전히 링을 바라보는 이유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다음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터뷰어/촬영/편집: 고초록 기자